Q: 본인과 하시는 일에 관해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하나님의 변호사로 살고자 하는 연취현 입니다. 현재는 법률사무소 y의 대표 변호사로 있습니다. 공정거래법과 기업의 계약관련 분쟁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엄마 손에 이끌려서 어릴 때부터 다녔습니다. 중고등학교까지 엄마를 따라서 열심히 다녔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철학과 여러 사상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공부하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무신론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니체를 읽고 엄마에게 “이 사람이 되게 유명한 철학자인데 이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는데, 여기에 대한 반론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어. 엄마가 이야기해 줄래? 내가 그 답을 찾으면 교회에 나갈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엄마가 답을 주시기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고, 저는 그것을 핑계로 더 이상 교회를 안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엄마가 오랜 시간 동안 눈물로 기도하셨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송구한 마음입니다. 그 뒤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Q: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셨습니까?
A: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했지만 늘 마음에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는데 학교에 신부님들이 강의하는 수업이 있었습니다. 그 수업을 들으면서 다시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외로움이나 공허함이 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선뜻 교회로 가지는 못했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기간이 한 5년에서 10년 정도 있던 것 같습니다. 혼자서 책도 읽고, 당시 간헐적으로 나가던 교회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만나지지 않으니까, 남들에게 다른 교회에 가야 하는지도 묻고 이러면서 고민하고 기도했던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그 시간 동안도 제 기도를 다 들으시고 저의 완악함과 연약함을 아시고 저를 세밀하게 인도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결혼한 후 아이를 가질 즈음 생겼습니다. 당시 제가 나이가 좀 많은 상태에서 가진 아기가 계류 유산 되었습니다. 이후 스스로 아이를 갖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혹시라도 다시 아기가 생긴다면, 하나님 앞에서 제가 어릴 때 교회 다니면서 느꼈던 행복감을 이 아이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라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주신 아기를 건강히 낳았고, 지금 다니는 교회로 옮기면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훈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 중에 하나님이 너무 좋아져서 “하나님 저는 이름 없는 평범한 변호사인데, 하나님의 변호사로 살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 기억에 남는 날인데 사실 그날 이 기도 후에 곧이어 회개 기도를 하고 왔습니다. 순간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아는 크리스천 변호사가 얼마나 많을 텐데 뭐 나 같은 게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는 것처럼 마치 선물 드리는 것처럼, ‘내 것’을 드리는 것처럼 고백을 했구나… 이것은 참 교만한 마음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고백과 회개가 뒤섞인 그런 철야 기도회를 마치고 나왔습니다. 당시에 저는 육아 중이었기 때문에 자모실에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우는 그 번잡한 환경에서도 매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매주 제 삶에 간증이 있고, 목사님이 예수님을 만나면 특별한 인생이 된다고 하셨는데, 정말 제가 특별한 인생이 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후로 성도이자 변호사가 아니라, 변호사인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Q: 그렇다면 법학이라는 진로는 신앙과 관계없이 정하신 것인가요?
A: 네, 원래 고등학교에서도 이과를 지망해서 대학도 이공계열로 가려고 했습니다. 진학할 당시는 이미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서 교회 마당만 밟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겠지만, 적어도 법대를 선택할 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어떤 사명을 발견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의 성향을 볼 때, 법을 하는 게 좋겠다고 강력하게 추천해 주셨는데 어머니의 뜻을 선뜻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수 없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웃음) 결국 어머니의 뜻을 따라 전공을 바꾸고 변호사가 되어서 10년 넘게 평범한 변호사로 살아왔습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 때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교회에 법률적인 도움을 주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있는 변호사로서 좀 더 선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변호사 정도가 제가 생각했던 크리스천 변호사의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제가 훈련되기 이전까지 저 스스로 성장과 성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주셨습니다. 보통 주변의 변호사들을 보면, 교회에 등록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가대나 교사 봉사를 권유받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저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셔서 이제 막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작한 영적으로는 작고 나약한 새 신자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무런 부담감이 없이 자유롭고 즐겁게 느껴졌습니다. 그 시기가 보호와 훈련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나의 존재 가치가 내가 갖추는 어떤 자격이나 모습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 자격증으로 굳이 무엇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의 제 존재가 충분히 값지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제가 생명과 관련된 외부 활동을 하기 이전에 교회에는 제가 변호사라는 것을 아는 분이 별로 없으셨습니다. 교회에서 저의 법률적인 지원이 필요한 경우에도 반드시 제가 속한 셀 리더분을 통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해주셔서 저의 영적 성장 단계에 맞게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저의 셀 리더분께서 조율을 잘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시기가 제가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하나님이 쓰시기에 쓸 만해지게 다듬어진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Q: 현재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가정과 생명 그리고 여성을 주제로 활동하고 계시는 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A: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첫 아이를 갖게 되는 과정에서의 일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이 주제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니는 교회에서 훈련받았는데, 가정과 부부의 의미 그리고 가정에서의 순종과 같은 주제였습니다. 저에게는 가정에서의 순종이라는 것이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습니다. 제가 자라온 과정에서 저는 집안이나 제가 속한 사회에서는 늘 똑똑한 여성으로서 존중받으면서 자라왔는데, 그러다 보니 어떤 질서에 따라서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 모습을 돌이켜보면 남편이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이런 제 모습에 대해서 사과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정의 질서 안에서 순종할 수 있도록 저의 모난 모습들을 어루만지시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저란 사람이 비로소 가정의 질서에 따라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저의 모난 상처들이 누구에게 드러내도 아프지 않은 상태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들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직접적인 계기는 둘째 아이를 가질 때였습니다. 둘째 아이를 두고 기도를 하던 중이었는데,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둘째를 주신다는 것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지는 꿈이었습니다. 남편에게 둘째가 생길 것 같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날 아이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남편이 증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웃음) 우연의 일치라고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제게는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내가 너를 알았다’(렘 1:5)는 말씀이 직접적으로 체험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기 이전부터 우리를 지으실 것을 예비하셨고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그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있었던 여러 일들 통해서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낙태죄와 관련해서 대학생들 스터디를 도와줄 멘토로 섬기는 일이 생겼는데, 당시 저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변호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터디 당일에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전문을 처음으로 읽고 갔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후 프로라이프 사역을 위한 스터디를 하자는 제안이 이어지게 되었고, 행동하는 프로라이프 사역을 제안 받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이 우연처럼 겹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지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성 변호사 중에서 말하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나서기를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서 마음이 많이 어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꿈에서 본 선명한 이미지가 이 일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초원 가운데 제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땅을 파서 제 앞으로 자꾸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앞에서 멈추셨고, 파헤쳐진 땅속에 무엇인가가 있지만,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 10절에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하셨던 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땅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핏소리가 있고, 하나님께서 이 핏소리를 막는 일을 감당할 사람을 찾는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감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저는 모른다는 말씀만 계속 반복했는데, 제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마음을 주셔서, 이 일에 있어서 저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쓰기를 원하신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낙태죄와 관련해서 제가 짜낼 수 있는 논리를 구성해서 반대 의견을 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생명 운동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변호사로 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그 일이 하나님의 변호사로 살겠다는 사명으로 이어진 것인가요?
A: 제가 하나님께서 저와 선임계약을 맺으셨다고 생각하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을 재우고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장면이 영화처럼 눈 앞을 지나갔습니다. 너무도 적막한 한 낮에 예수님이 계시고, 아무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작은 소리조차 없는 고요한 오후였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의 순간에 제가 “예수님, 저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님을 위해서 말하는 사람이 없네요. 예수님을 위해서 변론하는 자가 한 명도 없네요. 저는 세상의 수 많은 변호사 중에 이름이 없는 무명의 변호사인데, 제가 예수님 법정에 가서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저를 그 자리에 서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너 그거 굉장히 힘든 일이다. 베드로도 세 번이나 나를 부인했다.”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힘드신 순간에도 저의 힘들 것을 먼저 생각하시는 것이 너무 아팠고, 감사했고,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깨달아 졌습니다. 그 후에 제가 한참을 울고 예수님이 안아주시는 그런 환상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일이 예수님과의 선임 계약이 있던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입장에서 한 마디를 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Q: 변호사는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가 필요한 직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가치관이나 기준이 다르더라도 변호사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연 변호사님도 적지 않은 시간 변호사로 활동했는데, 변호사로서의 직업윤리와 크리스천으로서의 가치관이 충돌한다고 느끼신 적은 없으십니까?
A: 제가 성도로서의 정체성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저는 성경에서 세상의 법도 지키라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세상의 법을 잘 지키는 것과 성도로서의 정체성이 서로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낙태 합법화를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여자 변호사로서 공개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저희 남편도 제가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변호사가 얼마나 많이 있는데 그리고 저보다 경력이 더 많은 분도 많으신데 왜 굳이 나서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낙태 자체는 저의 직업윤리에도 반하지 않는 일이고, 저의 의무 사항도 아닌 일이지만 저는 여기서 어떤 가치관의 충돌을 느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회적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변호사가 사회적 엘리트로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변호사가 꼭 그런 역할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의무를 부과하지도 느끼지도 않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낙태 합법화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내면, 저에게 다음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마도 제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이런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계획이 있거나 목적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 생각을 놓지는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웃음) 사실 제가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누가 듣든지 듣지 않든지 진리를 선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뢰인들을 생각하면 제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너무 많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되려 피해가 가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저 역시 사회의 이슈에 대해서 너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크리스천을 부담스러워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너무 꿈 이야기만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제가 돌로 된 성을 올라가고 있는데 그 성이 갑자기 무너지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꿈을 깨고 저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무너질 것이라는 마음을 주셨는데, 그 후로부터 제가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제가 보는 법이 달라지고 제가 보는 뉴스가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되고, 저의 이성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도 있었지만, 무엇이 하나님이 보시는 바에 가까운가를 고민하고 공부하면서 저의 이성을 되살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Q: 조금 민감한 질문일 수 있는데,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주제들을 볼 때, 어떤 동일한 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낙태 금지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의 존중함에 대해서 누구도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범죄에 의한 임신 같은 특수한 경우, 혹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양육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의 출산 경우에 한정하더라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 제도적인 장치들이 미흡해 보이는 부분도 있다고 보입니다. 즉 원론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와 현재 상황을 둘러싼 사회환경의 문제가 구분되지 않고 이야기되지는 않느냐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낙태를 반대하시는 입장에서 예를 들어 말씀드린 미흡한 사회환경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A: 법과 원칙을 논하기 이전에 원래 사회에는 도덕과 양심이라는 쿠션 영역이 있습니다. 법은 도덕과 양심의 질서에 의해서 규제가 되지 않는 부분을 처벌하는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는 이 완충지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과거 법의 기능이 주로 처벌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지금은 어떤 지위나 권리의 보장을 목적으로 법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률가들이 단순히 법적 영역뿐만 아니라 윤리와 도덕의 영역까지 관여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낙태를 합법적 행위로 인정하는 문제는 크리스천들이 신앙적으로 낙태를 죄로 판단하는 영역과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사회 안에서 낙태를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로 보느냐? 혹은 처벌받아야 하는 행위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는 신앙적 가치가 아닌 사회적 양심과 도덕에 대한 문제입니다. 낙태를 권리로 보장하라는 주장에 대해서 저희는 낙태가 권리로 보장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을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양심과 도덕 그리고 그에 기초한 법적 책임을 논하는 것은 이 논의에 대한 결론이 난 이후의 문제입니다. 제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부분은 낙태를 단순하게 비범죄화하려는 정도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합법화 또는 권리로 보장하려는 수준까지 개념을 확대하는 시도입니다. 이 문제는 단지 생명을 기독교적 가치를 기준으로 바라볼 것인가? 혹은 낙태를 처벌받지 않는 행위로 볼 것인가? 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미 젊은 여성들이 낙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트에 가보면 태아를 마치 암세포를 떼어내듯이 표현하는 의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생명에 대한 책임과 양심과 도덕의 기준을 말살해 가고 있지는 않는가?라는 우려를 낳게 합니다. 단지 기독교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이 합법과 불법을 나누는 영역 이전에 양심과 도덕의 영역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젠더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이 문제를 품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마음 가운데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젠더 이슈에서도 권리의 보장과 피해를 받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일례를 들어서 장애인 주차장의 경우, 일반적으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보행이 어려운 경우가 많고 또한 그러한 상황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건물의 가장 주차하기 편리한 자리에는 장애인 주차장을 설치합니다. 그런데 보통 장애인 주차장 좌우로 점선으로 표시한 구역이 있습니다. 장애인 주차장과 관련하여 주차 구획선이 아니라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이 점선 부분까지도 비장애인 차량이 침범하면 처벌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사람 간에 사적인 조율이 이루어지는 영역까지도 기준을 명시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그 점선 부분에 일반인 차량이 침범한다고 해도 주차 구획선으로 분리된 공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승·하차는 물론 주차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법이 통과되면 장애인들은 점선 영역까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법제화가 가진 부작용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기존에 도덕과 양심으로 조율되던 영역이 법의 영역으로 대체되고 있고 이것은 누군가의 권리가 되는 동시에 누군가의 처벌로 이어지게 됩니다. 법은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권리보장과 처벌강화라는 이중의 잣대가 오히려 사회 안에서의 도덕적인 배려와 양심적인 기준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법제화를 추진하시는 분들과 말씀을 나누어 보았을 때, 이런 부분에 대해 인식을 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법률가로서 이 부분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부분이 사회적인 혼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사회 내의 갈등을 더 부추기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이혼했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아이들은 서로 잘 지내야 합니다. 부모의 결혼 상태에 따른 차별 없이 아이들이 잘 지내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부부의 이혼을 정당화하거나 결혼 관계의 중요성을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강하게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권리의 보장이 반드시 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장애인 주차장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드린 것과 같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처벌의 심리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의 법과 제도가 올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도덕과 양심의 영역이 권리와 처벌의 영역으로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는 변호사의 의무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분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는 성도로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방식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생각합니다.
Q: 실천에 있어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면 연 변호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실천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A: 젠더에 대해서는 제가 주로 활동하는 영역은 아니라, 말씀드리기가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제가 주로 고민하는 생명에 대해 말씀을 드린다면, 낙태하는 여성들 역시 매우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를 학대해서 아동 유기를 하고 처벌받는 엄마들에 대한 변호 요청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명을 지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인데, 아이를 낳아서 버린 엄마들을, 심지어는 베이비박스 안에도 넣지 않고 처벌받을 상황에 있는 분들에 대한 변호를 요청 받은 적도 있습니다. 변호인이기 이전에 성도로서 그 상황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도해주고 교회로 나올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같은 죄를 다시 범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모른다고 하지 말고 또 돕고 다시 돕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동 유기에 있어서 아이가 비록 버려졌지만, 엄마를 강하게 처벌하는 것이 엄마와 아기에게 가장 최선일까요? 저는 엄마가 건강하게 아기를 양육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안에 대해서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생명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입장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판단도 생명에 기초한 판단일 수 있고 그렇게 볼 때 다양한 대응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은 각자가 믿음의 크기에 따라서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가정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혼 가정이나 앞에서 말씀하신 이혼한 가정도 증가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런 가정의 형태를 불완전한 가정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와 다자녀로 구성된 교회의 이상적인 가정의 형태가 아닌 가정을 교회가 맞아들일 때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저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첫 번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에 대한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바로 세워지면 회복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담배를 끊으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제 술이나 담배는 기호 식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술이나 담배를 끊지 않는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기호로 여겨지다 보니, 목사님들께서도 직접적으로 이런 부분을 말씀하시는 경우도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 보면 담배를 멀리하고 싶고, 실제로 담배를 끊는 분들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과 비슷한 문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질서가 회복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사회의 흐름을 반영해서 사회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을 지켜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하나님의 변호사로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라고 주신 것들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사명을 갖고 살아가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길을 가실 때 일과 신앙이라는 영역이 그런 정체성을 갖기 이전보다 많이 겹치지 않으셨을까 즉 경계와 구분이 많이 없어지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연 변호사님께서 느끼시는 두 영역 간의 간극은 어떻습니까?
A: 결국은 저의 세상의 욕심들을 내려놓는 것이 그 간격을 줄이는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사건을 변호하는 제 업무 시간의 일부를 쪼개서 이런 활동을 하므로 마음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더 많이 채워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조차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자꾸 깨닫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이후에도 하나님께 떼도 쓰고 합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제가 어떻게 해요? 저는 이게 생계인데요.” 제가 여유가 있어서 부업으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란 듯이 사건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편에서 저에게 물질을 공급하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그런데 제가 필요 이상의 것을 계속 달라는 것이 오히려 문제이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저의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변호사로서 저의 목표와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더 깊은 물로 나아가라는 성경의 말씀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제가 여기서 멈춘다고 하나님께서 저를 정죄하시거나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더 깊은 물가로 나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동시에 머뭇거리는 제 자신에 대해 애통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낍니다. 아직은 이런 부분 때문에 저의 일과 신앙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만, 그 깊은 물로 나아가기 위해 더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 제 시간의 더 많은 부분을 활동에 쏟아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변호사로서의 직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변호사직까지 내려놓고 활동하면 하나님께 저 이제 다 내려놨으니까 더 좋은 걸로 채워주세요. 정도의 신앙이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웃음) 내가 할 수 있는 분량을 하고 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분량을 하고 이것의 조화를 잘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앙인의 삶이라는 게 엄마로서, 직업인으로서, 변호사로서 또한 하나님의 변호사로서 각각의 영역에서 조화를 이루어서 그것을 기쁨 안에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영역의 크기를 키워가는 것이 삶에 있어서 신앙의 성장이고 훈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Q: 한국 교회를 보실 때 가장 안타까운 점은 무엇입니까? 또한 희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제가 교회에 대해서 감히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복과 은혜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법률가로서는 최고의 엘리트는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저를 내려놓는 과정이 조금은 쉽지 않았나 생각도 듭니다.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회적 지위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평생 기도하시는 분이시고 저를 위해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데, 제가 이런 활동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니까 “하나님이 너는 돈 벌지 말라고 하셔?”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성숙이라는 것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내려놓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성공이 크면 클수록 내려놓을 것도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조금씩 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처음 뜨겁게 알아가던 때에 자모실에서 목사님 말씀을 너무 듣고 싶은데 아이가 칭얼대니까 아이가 미운 마음이 드는 저를 보았습니다. 사실 말씀은 언제든지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아이를 미워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예배당 주변의 주차로 말이 나오는 것은 참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그 교회가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고 교회 주변의 주민들을 배려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삶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작은 훈련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최근에 자살 뉴스가 많이 보도되는데, 저는 그 자살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교회들은 정말 크게 뉘우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역에 있는 그런 분들을 놓친 것에 대해서 가슴을 부여잡고 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역을 섬기는 봉사가 우리의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지역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 한 번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정말 안타깝게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만난 범죄자 중에는 영혼에 구멍이 난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복음 한 번 듣지 못 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어떻게 그 외로움을 다 견디는지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예수님을 전해보기도 합니다. 그런 관심에 대해서 고맙다는 편지가 오기도 합니다. 그분들의 심령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복음이 더 쉽게 그분들의 마음에 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작지만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사회의 조직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나타나도록 노력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이 교회가 되고 각 성도가 지역 사회의 빛이 되지 않고서야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교회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너무 추악하게 바뀌어 갑니다. 변론 중에 마약범죄나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 중에 정말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딤전 4:1~2)는 성경 말씀처럼 도덕과 윤리와 타인에 대한 관점이 모두 마비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의 그 병든 마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감옥에서 빼내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시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신앙이 있으신 부모님조차 말입니다. 부모 세대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어쩌면 사회적인 성공에 매여있는 사이에 우리 아이들이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이대로 마지막 때가 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고 부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들이 일어나고 그 세대를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다음 세대를 살리는 그 복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1~2년 전만 하더라도 낙태에 대해서 목사님들과 대화하면 어떻게 강단에서 낙태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있냐고 어려움을 표하셨습니다. 70년대에는 국가적으로 낙태를 권했기 때문에 이미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낙태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릴 때 귀를 막지는 않으시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더디지만 이런 변화들이 쌓이고 또한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들이 쌓일 때 부흥의 때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그것을 믿고 일하는 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역사를 믿고 있습니다. 점차 동참하는 분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s